“도덕성” 논란

2012.04.09 글쓴이 youknowit

오픈웹이 어째서 웹표준 이야기는 안하고 선관위 사건을 들이파고 있냐는 분들도 계십니다. 오픈웹을 시작했던 6년전 상황에 비교할 때, 웹표준 문제는 이제 오픈웹이 더 이상 기여할 부분이 별로 없습니다. 물론, 현실은 아직 갈 길이 멀지만 적어도 웹표준이 무엇인지, 왜 중요한지는 이제 거의 모두가 이해하고 있습니다.

금융거래 보안/공인인증서와 관련된 문제에 대해서도 오픈웹은 그동안 열심히 그 입장을 설명했습니다. 앞으로도 국내 “보안 담론”의 허구성에 대하여는 지속적으로 문제제기를 할 것입니다. 공인인증서가 그렇게 훌륭한 보안 수단이라면 그야말로 강제할 이유가 없습니다. 진정으로 보안에 도움이 되고 사고거래를 줄일 수 있다면, 굳이 강요 안해도 금융기관들이 앞다투어 쓸 것입니다. 물론, “보안 문제”는 웹표준 문제보다 훨씬 강고한 심리적 장벽이 있고, 보안업계-감독관청의 이해관계/감독권한을 둘러싼 밥그릇 챙기기 문제가 걸려있어서 쉽게 해결되지는 않지만 결국은 업계의 기술 진전과 창의적 경쟁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시점이 올 것입니다.


오픈웹은 보다 넓은 의미의 “개방(openness)”을 추구하고자 합니다. 우리의 생각을 꽉 틀어막고, 억압하고 있는 사고(思考)의 장벽들을 하나씩 허물어 나가는데 조금이나마 기여하고자 합니다. 막힌데 없이 실상을 두루 살피고 정확히 파악하는 안목을 ‘내가 가지고 있다’는 뜻이 물론 아닙니다 ㅎㅎ. 다함께 노력해 보자는 것입니다.

국회의원에 입후보한 어느 분이 8년전 성인방송에서 한 “험담개그”에 대하여 “도덕성” 논란이 뜨겁습니다. 온갖 이슈들이 맞물려있지만, 한발 뒤로 물러서서 옛날 텍스트를 하나 소개할까 합니다. 논어(論語)입니다. 물론 공자와 논어에 대하여도 무수히 다양한 관점들이 있어서 이 글의 논지도 쉽게 전달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어쨌건 함 보죠.

관중(管仲; 약720BC-645BC)은 제(齊)나라의 재상으로, 제 환공을 보좌하여 제나라가 여러 제후국을 아우르는 패권을 장악하는데 공헌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공자는 관중에 대하여 인색한 평가를 내립니다(논어, 3.22).

“관중은 쪼잔해!” (管仲之器小哉!)

그러자, 누가 궁금해 합니다.

“검소했다, 그 말씀인가요?” (管仲儉乎?)

검소하긴 커녕, 졸부에 가까울 뿐 아니라 예의 법도도 모르는 사람이라고 공자는 관중을 혹평합니다.

그 사람은 집을 세채나 가지고 있었고, 집마다 하인들이 따로 있었어. 그게 검소한 건가? (管氏有三歸,官事不攝,焉得儉?)

그리고, 제후도 아니고 그를 보좌하는 주제에 감히 제후들이 하는 화려한 장식을 자기 집에 하고 있었어. 관중이 예의를 알면 개나 소나 예의를 알게? (管氏而知禮,孰不知禮?)

그러나, 관중이 “인(仁)”이라는 덕목을 갖추었는지에 대하여 공자는 매우 흥미로운 입장을 보입니다. 이 부분이 제가 말씀드리려는 핵심입니다만, 그것이 쉽지 않은 이유는 바로 “인(仁)”이라는 개념이 지금껏 너무 오해/오역되어 왔기 때문입니다. 관중이 “인(仁)”을 구비했는지에 대하여 이야기 하기 전에, 공자가 말하는 “인(仁)”이 뭔지에 대하여 원전 텍스트를 몇개 봅시다.

‘仁’이란 무엇인가?

“仁”이라는 글자를 우리는 흔히 “어질 仁”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어질다”가 무슨 뜻인지 분명하지 않지만, 꾹 참고 너그럽게 관용의 미덕을 베푸는 것, 꼴보기 싫어도 온화하게 용서해주는 것, 자비롭고 따뜻하게 품어주는 것이 인(仁)이라고들 생각합니다. 영어권의 중국학 연구자들도 마찬가지 입니다. benevolence, compassion 등으로 仁을 번역해오고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仁과 人이 발음도 같고(ren), 상형 구조도 근접하며, 실제로도 고문헌에 자주 혼용되는 사례가 있다는 점에 착안하여, “인간적으로” 따뜻하게 상대를 대하는, “온정이 넘치는” 태도가 仁이라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인간적”이라는 것이 뭔지 저는 도통 모르겠지만. 영어권 학자 중에도 이런 견해를 채용하여 humaneness 라고 仁을 번역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공자의 설명을 함 보죠.

까칠하고, 깐깐하고, 투박하고, 말 수도 별로 없는 것, 이게 오히려 仁에 가까워. 剛毅木訥,近仁 (논어, 13.27)

더러운 꼴을 보더라도 “좋은 낯으로, 부드럽고, 점잖게 말하는 것”? 그건 “교언영색”이고, 仁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멉니다(巧言令色,鮮矣仁)! 당대 사람들도 이점을 흔히 헷갈려 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공자의 제자들은 이 구절을 여러번 반복하여 강조합니다(논어, 1.3, 17.17). 공자도 이렇게 말합니다.

듣기 좋은 말이나 하고, 좋은 낯으로 대하고, 졸라 공손하게 행동하는 것을 쭈오치우밍은 쪽팔려 했어. 나도 그래. 원한을 감추고 친구처럼 좋게 대하는 짓을 쭈오치우밍은 부끄러워 했어. 나도 그래. 巧言、令色、足恭,左丘明恥之,丘亦恥之。匿怨而友其人,左丘明恥之,丘亦恥之 (논어 5.25)

불의를 보고도 “자신을 억누르고 너그럽게 대하는 것”을 “어질다(仁)”고 하나요? 그건 비겁한 병신 짓이고, 공범자가 저지르는 행동입니다. 옳지 않은 일이 있으면 “참지 않고” 맞서는 용기, 결기, 강단이 바로 공자가 말하는 “仁”에 가깝습니다. 쫄아서 꼬리를 내리고 “꾹 참는” 것이 仁이 아닙니다. 쫄지 않는 용기, 피해를 보더라도 과감히 맞서 짱돌을 던지는 “깡아리”가 오히려 ‘仁’에 가깝습니다.

仁한 사람은 반드시 용기가 있지. 하지만, 용기가 있다고 해서 仁한 것은 아니지. 仁者,必有勇。勇者,不必有仁 (논어, 14.4)

仁은 한마디로 “윤리적 결기”, “쫄지 않는 강단”입니다. 물론 올바른 판단이 반드시 전제되어야 하겠지요. 사시미칼을 마구 휘둘러 대는 조폭도 쫄지 않기는 마찬가지니까요. “용기 있다고 해서 仁한 것은 아니다”라는 중요한 단서가 그래서 붙는 것입니다.

누구를 감싸주고 옹호하는 것, 이것도 윤리적 강단이 필요하고, 누구를 증오하고 공격하는 것도 윤리적 강단(깐깐함)이 필요한 것입니다. 唯仁者, 能好人 能惡人 (논어, 4.3)

“仁”을 그저 너그러움, 자비, 관용, 인자함, 심지어는 온순함이라고 오해하기 때문에 논어 귀절의 많은 부분들이 그 의미가 심각하게 훼손되고 왜곡되어 왔습니다. 관중에 관한 다음 귀절도 마찬가지 입니다. 이 귀절에 나오는 仁도 너그러움이나 인자함이 아니라, “윤리적 강단”, 이른바 “치열한 도덕성”의 문제를 다루는 것입니다. 이제부터 “仁”이라는 단어는 “도덕성”이라고 표시하겠습니다(“어질다”라는 한심한 오역을 피하기만 하고, “仁하다”라고 그냥 둘 경우, 읽는 사람들은 그 의미를 인자함/너그러움/온순함이라고 백발백중 오해하는 경우를 너무 많이 봤기 때문입니다).

“도덕성”이란 무엇인가?

자공이 말하기를, “관중은 도덕성이 없는 자 아닌가요? 제 환공이 그의 형(糾)을 죽게했을 때, 관중은 자살하기는 커녕 환공 밑에서 벼슬을 했잖아요.” 子貢曰:「管仲非仁者與?桓公殺公子糾,不能死,又相之。」

규와 환공은 형제 간이었고, 관중은 원래 규(糾)를 모시고 있었습니다. 규와 환공이 제(齊)나라 제후 자리를 놓고 “형제의 난”을 벌일때, 규를 보좌하던 관중은 환공을 살해하려 시도했으나 실패하였고, 규는 이웃나라로 도망가고 그 동생 환공이 제나라 제후가 된 후, 이웃나라를 압박하여 규를 살해하게 하였습니다. 자신의 보스가 이렇게 살해되면 관중도 마땅히 자결하는 것이 당시의 “도덕성”에 부합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관중은 친구(포숙아)의 빽을 동원하여(이른바 “관포지교(管鮑之交)“) 오히려 환공의 재상으로 기용되는 수완을 발휘하였습니다. 자공(공자의 제자)은 바로 이점을 지적하며, 관중의 파렴치한 “배신”과 “줄타기”라고 비난하는 것입니다. “도덕성 제로(0)”라는 것이죠. 참조.

공자의 대답은 다음과 같습니다.

관중은 환공을 보좌하여 여러 제후국의 패권을 차지하고 천하를 바로잡았어. 오늘날까지도 사람들은 그 혜택을 누리고 있어. 관중이 없었어봐, 오랑캐들이 우리를 지금 지배하고 있을거야. 필부들처럼 소갈머리 없이 자결하고 그 시체가 시궁창에 딩굴어도 아무도 알아주는 사람도 없는 그런걸 원하나? 「管仲相桓公,霸諸侯,一匡天下,民到于今受其賜。微管仲,吾其被髮左衽矣。豈若匹夫匹婦之為諒也,自經於溝瀆,而莫之知也。」 (논어, 14.17)

자로(공자의 제자)도 비슷한 질문을 했고, 공자의 대답은 더욱 분명합니다.

“환공이 규를 죽게했을 때, 소홀(召忽)은 자결했는데 관중은 자결을 안했어요. 도덕성이 없는 것 아녜요?” 子路曰:「桓公殺公子糾,召忽死之,管仲不死。」曰:「未仁乎?」

“환공이 아홉 제후국을 규합하는 일을 전쟁 한번 안치르고 성사시킨 것은 관중의 능력이었어. 그 정도 도덕성을 갖춘 사람이 어디 있나. 그 정도 도덕성을 갖춰봐.” 子曰:「桓公九合諸侯,不以兵車,管仲之力也。如其仁!如其仁!」 (논어, 14.16)

“결과가 좋으면 모든 것이 정당화 된다”거나, “부도덕해도 좋다, 부자되게만 해다오”라는 따위의 천박한 주장을 공자가 내세우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 논어의 여러 다른 귀절들을 보면, “도덕성(仁)”은 공자가 설파하는 윤리 체계의 가장 중요한 핵심을 이루는 것이지만, 결코 단순한 흑백 논리로 단정 짓거나 절대적이고 무조건적으로 내세울 수 있는 도그마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은 분명합니다.

사안의 경중을 종합적으로 살피고, 상황과 처지를 두루 감안하는 균형 감각이 필요합니다. “도덕성”이 마치 무슨 “절대적 가치”인양, 하늘이 두쪽 나도 관철되어야 할 “하느님 말씀”인양, 앞뒤 물불 안가리고 시도때도 없이 들이미는 경박하고 교조적인 태도는 안습일 따름입니다. 거기다가 만사를 “논리”로만 재단하려는 단순함까지 더해지고, 자신의 도덕적 우월감까지 부지불식 간에 스며들게 되면, 뭐 거의 걷잡을 수 없는 지경이 되는 것이지요.

다음 귀절을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공자님 말씀”입니다. ^^

기쁜 마음으로 도덕성을 실천하는 사람은 도덕성이 모자라는 자를 미워하지 않아. 그런 경우 못봤어. 도덕성을 흔쾌히 실천하는 사람은 그걸 그리 대단한 것으로 여기지 않지만, 도덕성이 모자라는 자를 미워하는 자는 그걸 도덕성이라고 여기지. 도덕성이 모자라는 자를 사용해서 자기 자신을 높이려하지마. 我未見好仁者,惡不仁者。好仁者,無以尚之;惡不仁者,其為仁矣,不使不仁者加乎其身。(논어, 4.6)

지가 좋아서 도덕적인 삶을 사는 거라면(好仁者), 그게 뭐 대단할 거 있나요? 상받고 칭찬받으려고 그렇게 사는 분들에게는 그게 엄청 소중하고 존귀한 것이어야 하겠지만…

Categories: 오픈웹 | 1 comment  오픈웹 구독 메일로 받기

  • http://twitter.com/aion_yong 아이온-보탄,천족

    <>의 신선한 접근입니다. <>를 이런 식으로 번역해주시면 정말 좋겠군요.
    도올 선생 번역도 있지만 너무 번잡해서 읽다 보면 그 종지가 뭔지 안개 속을 헤매는 듯 하거든요. 안개가 확 거치는 느낌입니다.
    하여튼 김용민의 문제는 우리 사회의 여러 질곡의 단면입니다. “자기배반”의, 자기 의식이 없는 자들이 넘쳐나는 우리 사회의 문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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